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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by hyungz


#159 일상

20170831
이른 아침부터 하나 둘씩 떠났다. 웃는 놈도, 우는 놈도 있었다. 떼를 지어 날아가는 철새를, 시선이 닿는 곳 까지 좇아보다가, 아무렇지 않게 다시 앞을 보는 것처럼. 담담해야지. 하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한 두명씩 짐을 챙겨 나갈때마다 아쉬움이 커졌다. 점심을 먹을 때 쯤 호명이 되었고, 나는 뜨거운 땡볕 아래 의류대와 박스 몇개를 든 채로 섰다. 버스로 가는 길에, 밥을 먹고 나온 동기들이 이름을 외치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고마웠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딱지 접어놓은 동기들 연락처를 확인했다.
목적지는 영동, 종합행정학교였다. 잠도 오지 않았기에 열차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내가 지난 6주를 어떻게 버텼을까. 눈물 콧물 줄줄 흘리던 화생방 훈련, 팔꿈치 무릎 다 까지게 한 사격자세 훈련, 뙤약볕 아래 행군, 폭우 때문에 떠내려간 야영지, 심심하면 받는 얼차려. 먼저 군대에 간 친구들이 생각났다. 그 철없던 놈들도 다 겪었겠구나. 책을 꺼내 조금 읽다가 짧게 잠을 잤다. 도착했을 땐 껌을 요란하게 씹고 있는 교관 하나, 헌병 패치를 붙인 조교 하나, 해병 넷이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됬다.


20170908
다가올 일들에 대한 스트레스가 늘었다. 스스로에게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 거야. 뭐라하던 의연하게 해버리면 되는 거야' 말을 걸었다. 문득 이러다 말을 안하게 되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베르베르 소설의 뇌만 꺼내놓은 과학자가 생각났다.
오전에는 검문검색 평가를 봤고, 오후엔 전투기술을 배웠다. 교관도 특공대 출신이었고, 배우는 것들도 그 쪽의 것들이었다. 사실 오늘 훈련은 훈련소 때에 비하면 거의 주말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끝날 시간이 되니 다들 지쳐있었다. 교관이 우리를 연병장에 앉혀놓고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 보면 존나 안 가는데, 돌아보면 빨리 가는게 군생활이야."
순간 교관 주위로 메마른 바람이 휙 불어올 것만 같은 멘트였다.


20170910
아무리 무거운 짐이라도 밤까지는 운반할 수 있다. 또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하루 동안이면 할 수 있다. 누구든지 즐겁게, 참을성 있게, 청결하게 생활할 수 있다. 해가 지기까지는.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인생이 의미하는 모든 것이다.


20170911
계절이 바뀌어 가는 중인것 같다. 오늘은 비가 왔다. 공기는, 가볍고 시원한 수증기를 머금고 있었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투두둑하며 빗방울들이 불규칙 같은 규칙으로 훈련장 지붕을 두드렸다. 상황별 사격훈련이 한창이었다. 나는 평가를 끝내고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군인 류형주는 여기 있지만, 대학생 류형주는 사회에서 평소의 리듬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시계를 보았다. 10시 13분. 씻고 밥을 먹어야겠구나. 비가 오니까 나가서 튀김우동이랑 돈가스를 먹어야겠다. 카페가서 학기 초라 밀린 일기를 정리하고 규석이한테 술먹자고 전화를 해놓아야겠다. 학교를 가며 훈훈한 영화를 한 편 보고, 학교 앞에서 4캔 만원 수입맥주를 사가야겠다. 기타도 치고, 피아노도 치고, 비도 오니까 청승맞은 노래도 좀 부르고. 맥주를 반쯤 먹으면 규석이가 들어오겠다. 규석이도 한 캔 따고, 놀다가 본격적으로 마시러 가야겠다. 군인 류형주는 갑자기 외로워졌다.


20170919
깜깜한 밤이었다. 날씨는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별은 듬성듬성 떠 있었고 달은 흐릿했다. 우리는 오래된 10원 동전의 땟깔을 한 헌병동상 앞에 각자의 촛불을 들고 모여 서있었따. 배경음악으로 이루마, 그 중에 잔잔한 것들을 틀어줬다. 간부와 몇몇 특기병들이 앞에 나와 고맙다, 수고해라, 자긍심을 가져라, 같은 말을 차례대로 발표했다. 나는 군중 속에서 조용히 촛불에 집중했다. 고요하게 타는 불꽃 아래 촛농이 고이고 있었다. 어느새. 묵묵히 걷다보니 벌써 또 하나 지나갔구나. 정말 뒤돌아보기만 하면 빨리갈 군생활이다. 땅만 보고 걷다가 가끔씩 뒤만 돌아보자, 다짐했다. 동상 뒤 풀밭에 반딧불이가 날아다녔다. 자연의 빛깔이라고 하기엔 너무 선명한 것 같았다. 하나가 날자 여럿이 날기 시작했고, 우리는 모두 눈으로 반딧불을 좇았다. 중대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이크에게 할 말을 하고 있었다. 행사가 끝나고 우리는 길게 늘어서 촛불을 들고 막사로 복귀했다. '걱정말아요, 그대'를 불렀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어디에 붙여도 따뜻할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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